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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미술의 선두주자 유영국, 추상세계로의 여행

JI n KIM 2022. 6.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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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의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http://www.yooyoungkuk.org/

 

 

 

 

 

한국 최소 추상 미술 화가이자, 색채와 조형의 절제미를 한없이 보여주는 유영국 화백. 

한국 미술의 모더니즘 추상세계를 이끌어 왔던 유영국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본다.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






유영국 화백

 

 

한국 근대미술의 '전위 (avant-grade)'에 서서 추상미술의 영역을 개척하였던 선구자 유영국. 특히,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다양한 색채와 대담하고 철저하게 계산 된 추상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닌 화가이다. 유영국은 1916년 산 그리고 바다의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고,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등과 교류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을 자랑했던 일본 도쿄 문화학원에서, 유영국은 당시 도쿄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운동이었던 '추상'을 처음부터 시도하였다.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협회상을 수상했고 바로 회우가 되었으며, 무라이 마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 등 당시 일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추상미술 리더들과 교류하였다. 1943년 태평양전쟁의 포화 속에서 귀국하여,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오며 어선을 몰고, 양조장을 경영하며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5년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재개하고,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 등 전위적인 미술단체를 이끌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아오고 있다.

 

 

 

"산은 자연이 부여한 하나의 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추상의 빈 그릇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와 베고 잤을지도 모르는 산가 여인숙의 헌 베개같이 축소 해석되어 한밤 내내 친근한 대화를 오가게 한다.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절제된 형상과 강렬한 색채

 

 

유영국의 작품에서는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요소가 주가 되어 등장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긴장하며 대결하기도 하고, 모종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그 자체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고향 울진의 깊은 바다, 장엄한 산맥, 맑은 계곡, 붉은 태양 등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자연을 실사화 하여 자세히 담은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풍경들을 추상화한 유영국의 조형의 힘은 오히려 '자연의 정수'에 직접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그의 그림 속 장면은 바다, 산, 나무, 노을, 계곡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자연의 요소들을 단계적으로 추상화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형태를 단순화하고, 절묘하게 상호작용하는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되, 마티에르 즉 표면의 질감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을 탐구했다. 형태는 비정형적인 것에서부터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로 단순화했고, 색채는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삼원색을 기반으로 유영국 특유의 보라, 초록 등 색채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탄탄한 긴장감을 제공하고, 동시에 절묘한 조화를 표현해낸다. 이로써 회화적 아름다움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유영국 화백

 

 

 

 

"색채란 써보면 참 재미있는 거요. 옆에 어떤 색을 가져와야 이 색도 살고, 또 이 색도 살고... 또 그림이란 게 그래요. 음악의 경우에 심포니 같은 걸 들으면, 멜로디가 흐르다가 갑자기 '자자자 잔-' 하지요. 그림도 이렇게 보는 사람에게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림은 시각예술이니까 입과 귀하고는 상관 없고, 그러니까 색은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색채는 균형과 하모니를 이루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주 세밀하게 계산을 해낼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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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예술과 삶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영국은 한국 화단의 추상과 전위를 표방한 젊은 세대 화가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존재로 떠올랐다. 유영국 화백은 1960년에 현대미술가연합 대표를 맡으면서, '현대'미술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62년에는 신상회를 조직하고, 공모전을 통해 젊은 화가들의 창작 기회를 늘리기 위한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964년 돌연 그룹 활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스스로 선언하며, 15점의 신작으로 첫 개인전을 신문회관에서 개최하고,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거대한 산수를 마주하는 듯한 부감법의시점으로 내려다 본 사계절의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큰 화면에 펼쳐냈다.

 

특히 1974년 한 해 동안 개인전 발표를 앞두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여 제작된 그의 그림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깊은 숲속에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 이후 유영국은 매일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마치 노동을 하듯이 꾸준히 작품에만 몰두하였다.

 

 

 

유영국
유영국

 

 

유영국 화백은 "60세 까지는 기초 공부를 좀 더 하고 그 이후에는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리라" 생각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로 1970년대 준반 예순이 될 때까지도 끊임없는 조형실험을 계속 했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유영국은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오랜 지병과의 사투 와중에도 "자연에 좀 더 부드럽게 돌아간" 아름다운 그림들을 끊임 없이 제작하여 산과 나무,호수와 바다, 지평선과 수평선, 무엇보다 해와 달이 비추는 장면은 지극히 조화롭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완벽한 '평형상태'를 향해 나아갔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의 세계로 돌아올 때마다 마주친 유영국의 캔버스는 '생' 에 대한 따듯한 위로마저 관객에게 선사한다. 유영국은 격동하는 근현대사의 시기를 관통하면서도 '절대추상'의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자신의 삶과 예술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작품은 예술가로서 치열하면서도 절제되었던 그의 인생 전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림이 안 팔리는 시대를 주로 살았지만 팔린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음으로써, 나는 하고 싶은 생각, 하고 싶은 일을 그만큼 한 셈이라는 생각도 한다. 안 팔리니까 빨리 그릴 필요도 없고, 지금과는 달리 물감이나 캔버스 등의 재료도 넉넉지 못한 시기가 많았으므로 많이 그릴 여유도 적었다. 그러니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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